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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지식청년과 조선족남편의 반세기의 정
2020년 05월 19일 09시 47분  조회:499  추천:0  작성자: netizin-1

필자(수림제): 하향 51주년에 즈음하여 이 글을 써 평범치 않았던 그때 그 나날들을 기념하련다

1969년 4월 19일, 상해지식청년인 나와 나의 고향친구들은 동북 변강의 연길현에 와 자리를 잡았다. 힘들고 아름다왔던 그 행복한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속에 생생하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하향 51주년에 즈음하여 이 글을 써 평범치 않았던 그때 그 나날들을 기념하련다.

1969년 7월 상해지식청년 수림제는 ‘무쇠 처녀’전투대를 이끌고 세린하저수지 시공에 참가했다.(좌1 수림제)

우리의 혼인은 남들과는 달랐다. 나와 류정윤은 만난 그날부터 모든 사람들의 강렬한 반대를 받았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다. 나는 상해지식청년이고 그는 토배기 농민이고 나는 한족이고 그는 조선족이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혼인은 연길현 세린하판에서 큰 풍파를 일으켰다. 그의 부모님들은 외부의 강렬한 영향을 받아 이 혼사를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나섰다.

그는 여섯 형제자매중 맏이다. 조선족의 풍속습관에서 맏아들은 가정의 모든 중임을 짊어져야 한다. 하기에 며느리를 고르는 것은 가정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이였다. 허나 나에게는 조선족며느리로 될 조건이 하나도 없었다. 조선말도 모르고 살림 할 줄 몰랐으며 밭일 할 줄도 몰랐다. 그와의 결혼은 그야말로 허황한 꿈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압력과 부모님들의 반복적인 반대로 류정윤은 그만 앓아눕게 되였다. 공산당원이 어찌 지식청년과 련애를 할 수 있나? 집형편이 이렇게 어려운데 이런 계집애를 데려왔다가는 언젠가는 달아날 것이 뻔하다. 이런 저런 소문에 견디다 못해 그는 단식했다. 그는 단식으로 부모님들에게 항의했다. 얼마 안지나 그는 크게 앓았고 그 바람에 부모님들은 더럭 겁이 났다.

듣자 하니, 그때 시어머님은 모든 친척들을 모아놓고 이 혼사를 어떻게 하겠는가를 의논했단다. 결국 친척들도 할 수 없이 이 혼사를 인정했고 시어머님은 집체호에 와서 나를 찾아 말했다. “우리는 네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후에 우리 집의 가난한 생활에 네가 견뎌내지 못할가봐 그런거다. 만약 네가 상해로 돌아간다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하겠나? 그리고 우리 집안의 큰며느리를 하려면 네가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짊어지겠느냐 ? 네가 우리 조건에 부합되지는 않으나 아들의 뜻이 이러하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더러 이튿날 아들을 가서 만나 보라고 했다.

풍파가 지난 뒤 처음으로 정윤과 만났을 때 나의 마음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수로 복잡했다. 그래 우리의 만남이 잘못된 만남인가? 아니면 연분일가? 그는 우리가 서로 부부로 되지 못하면 나더러 자기의 동생으로 되여달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사랑은 순결했고 진실했다. 이 사랑을 위해 나는 길림공업대학으로 갈 기회를 포기했고 시내에 들어가 일할 기회도 포기했고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도 포기했으며 눈앞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변의 가난한 산골에 남았다. 그것은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것이였고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시집간 그날부터 나는 꼭 좋은 며느리로 되리라 작심했다. 나는 조선말을 알아들어야 했고 조선말을 할 수 있어야만 했다. 나는 낮이면 그들의 대화를 한어로 번역해서 기록했고 저녁이면 2메터 길이에 1메터 너비의 침대에 누워 종이로 벽을 바른 작은 방에서 신문지로 도배한 천정을 바라보며 낮에 적어놓았던 조선말을 암기했다. 근 일년이라는 시간을 애써 공부했더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말은 자기의 특색을 갖고 있었다. 로인, 어린이에 대해 한어로는 같은 말이나 조선말로는 말하는 방법이 여러가지였다. 언어를 배우면서 나는 많은 웃음거리를 만들었다. 시부모님과 많은 불경스러운 말을 했으나 사후에 그들은 모두 리해를 해주었다. 나는 자신의 총명과 나날이 향상하겠다는 결심으로 언어의 관문을 넘어섰다. 나는 지금 조선말로 회의를 사회할 수 도 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조선족의 며느리로서 밥 짓는 이 관문을 꼭 넘어서야 했다. 그때 나는 너무 두려웠다. 부엌에는 세개의 크고 작은 검은 가마가 줄느런히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났다. 시어머님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자기와 함께 밥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 어려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고비를 넘겼는지 모르겠다.

조선족은 또 하나의 범절이 있는데 바로 아침식사를 다 준비하고는 반드시 두개의 밥상을 차려야 했다. 하나는 남자들 밥상이고 다른 하나는 녀자들의 밥상이다. 언젠가 손님이 왔는데 나는 기쁜 나머지 정윤의 옆에 가서 앉았다. 이를 본 시누이가 말했다. “올케는 어찌 자기 앉을 자리를 몰라요? 지금 어디에 가서 앉았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았으나 끝내는 참고 녀자들의 상에 돌아와 앉았다. 조선족은 또 한가지 습관이 있는데 다 만든 음식은 꼭 먼저 남자들 상에 놓아야 한다.

하여 그 시대에서 가마솥안의 제일 우층의 이밥은 시아버님과 남편 등 남자들이 먹었고 밑층의 옥수수 누룽지는 나와 시어머님이 먹었다. 그 시절 나는 시어머님의 지도하에 조선족의 여러가지 음식 료리법을 배워내 소위 말하는 진짜 조선족 아줌마로 되였다.

1973년 봄, 연길현 룡정 세린하공사 세린하 5대에서 나는 남편네 35평방메터되는 초가집앞에서 가족사진을 남겼다.

이 가정에서 나는 인내와 순종을 배웠다. 나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최고 지시’로 삼았다. 우리 집은 나까지 식구 아홉명이서 35평방메터 되는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모든 가족에게 다 이불이 있는 것은 아니였다. 료리를 하든 국을 하든 기름을 넣지 않는다. 기름을 살 수 도 없었다. 매일이다싶이 된장에 된장이였다. 어떤 때는 소금 살 몇십전도 없어 돈을 꿔서 사야 했다. 이런 모든 것을 나는 다 겪어내야 했다. 그때 나는 상해 부모들이 나에게 보낸 돈을 모두 이 가정에 썼으나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이 가정을 선택했기 때문이였다.

어느 하루, 시어머니가 나를 찾아 말했다. 이전에 자기는 닭사양을 하면 닭이 죽고 돼지를 기르면 돼지가 죽어 부업수입이 없었고 배당금(分红)도 량식값을 제하기에 타지 못했단다. 그러면서 며칠뒤 동불사에 장날이 있는데 나보고 시아버님과 같이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님이 나더러 내가 좋아하는 씨암퇘지를 사오라고 했다고 정윤에게 알렸다. 남편은 동의했다.

그날은 4월의 어느 한 장날이였다. 나는 아침 일찍 시아버님의 소수레에 앉아 동불사로 향했다. 어쩐지 나는 그날 무척 기뻤다. 아주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아버님은 나더러 장마당에 나온 모든 돼지들을 돌아보게 했고 나는 그중에서 35원 주고 검고 큰 씨암퇘지를 샀다.

집에 돌아오자 시동생과 시누이가 돼지우리를 돌며 보고 또 보더니 돼지가 왜 이리 못생겼느냐고 했다. 온통 주름투성이인 돼지얼굴을 보며 나보고 돼지 고를줄 모른다고 놀려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십리 길을 오가며 돼지를 사왔는데 이렇게 놀려대니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하지만 나는 꾹 참고 꼭 돼지를 잘 키워내리라 작심했다. 그땐 돼지 기르는데 사료가 없었다. 모두들 산에 가서 풀을 캐다가 먹여야 했다. 나는 매일 산에 올라가 야채를 캐서는 마대에 메고 내려오면서 알심들여 돼지를 길렀다.

매일 아침 일어나 처음으로 하는 일이 바로 닭과 오리에게 먹이를 주고 돼지죽을 먹이는 것이다. 이 또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다. 닭들이 먹이를 빼앗아 먹는 것을 보노라면 나는 너무 재미있어 내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모두 잊군 했다. 곱지 않은 그 주름투성이 돼지가 우리 집에 온 뒤 우리 집 운명이 바뀌여졌다. 그놈은 해마다 두 배씩 새끼를 낳았는데 번마다 12마리 내지 15마리씩 낳았다. 처음에 25근에서 30근되는 새끼 돼지들은 15원 내지 25원에 팔 수 있었다. 이는 가난한 집안으로 말하면 재부가 아닐 수 없었다. 예닐곱근 되는 수탉이 그때는 4원 50전에 팔렸으니 말이다. 번마다 장에 갔다 돌아 올 때면 나는 나 절로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때로부터 시어머님은 우리 집의 모든 돈을 나더러 관리하게 했다. 시부모님도 모두 나한테서 돈을 타갔다. 이 역시 조선족 풍속의 하나다. 큰 며느리가 가사를 관리하고 살림을 주관한다. 시동생, 시누이가 시집 장가를 가기전까지 그때는 아주 가난했으나 우리 집은 모두가 한마음이였다. 나는 자신의 노력으로 고되고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이 가정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이 가족의 인정을 받았다.

남편 정윤은 여섯명의 형제 자매중에서 맏이다. 그이와 그의 형제 자매들은 지금까지도 화목하다. 막내 녀동생은 그이와 17살 차이가 난다. 하여 그들은 형님이며 오빠인 그이를 아버님벌로 대한다. 정윤은 나와 형제 자매들에게 모든 일에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쟁론하지 말고 모두 자기부터 문제를 찾아보라고 당부하군 했다. 이 또한 가훈이라고 할수 있었다. 나의 큰 시누이는 남편이 집을 떠나면서 8살, 6살과 4살배기 아이들을 남겨놓았다. 둘째 시누이는 남편이 병으로 돌아가면서 8살과 6살 나는 아이를 남겼다. 그들은 모두 좋은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시집도 우리 집보다도 가난했다. 그때 나는 벌써 세 아이의 엄마로 되였다. 우리 집에 속하지 않았던 아이 다섯명이 한꺼번에 더 생겼다. 이는 우리 가정에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 가정의 살림을 맡은 나는 정윤의 얼굴을 보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결정을 내렸다. 나는 시어머님과 로투구에 둘째 시누이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다. 그때는 뻐스가 없어 모두 걸어가야만 했다. 이튿날 아침일찍 나는 20리를 걸어서 세린하에서 동불사로 갔다. 시어머님은 원래 나를 가지 말라고 했다. 길이 너무 멀어 내가 걷지 못할가봐 걱정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걸어서 동불사까지 갔다. 맙소사, 동불사에서 로투구까지 아직 십여리 길이 남았다. 어떻게 갈가? 나는 세린하와 동불사 길목에서 로투구로 향하는 화물차를 얻어 타고 가려 했다. 차량은 한대 두대 지나갔으나 누구도 세워주지 않았다. 나는 애가 날대로 났다. 로투구로 가는 차를 불러달라고 하늘에 대고 빌어보기도 했다. 나는 정말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차가 나의 앞에 와 서주기를 바라면서 계속하여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돌을 실은 차가 나의 앞에 와서 멈춰섰다. 희망이 보였다. 운전기사는 나를 로투구 철도 옆에 있는 마을까지 데려다주었고 나는 쉽게 둘째 시누이네 집을 찾았다.

나는 그녀의 처지를 정말 동정했다. 남편 없는 녀자가 어찌 홀로 농촌에서 생활하고 농사를 짓겠는가? 나는 정윤과 시부모님과 토론도 하지 않고 그날로 둘째 시누이네 일가를 데려와 시부모네 집에서 같이 살게 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모순이 생기기 마련, 모녀 사이도 매 한가지였다.

둘째 시누이는 엄마가 자기 애들을 원래 이 가정에 속하지 않은 애들이라며 다른 눈으로 본다고 여겨 말다툼의 씨앗으로 되였다. 그러자 시어머님은 매섭게 나에게 말한다. “너는 왜 내 동의도 없이 제 마음대로 그들을 데려 와서 집안이 부산해지게 만드냐?” 맙소사, 내가 잘못 했나? 시어머님과 딸의 불화로 시어머님은 늘 나에게 화를 냈다. 어느 하루, 나는 시어머님과 말했다. “어머님 딸은 나보다 어머님이 더 사랑하고 아낄겁니다. 맛 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딸이지 내가 아니잖아요. 이건 현실이에요. 내가 시누이를 어머님과 함께 있으라 한 것은 딸에 대한 사랑이 어머님이 나보다 엄청 더 크기 때문이예요.” 그뒤로 모녀 관계는 아주 좋아졌다.

외부모 가정에서 자란 두 시누이네 자식들은 모두 출세했고 지금은 미국, 일본과 한국에서 살고 있다. 다들 유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어 나는 시름이 놓인다.

살아가면서 부부사이에는 모순이 생기기 마련이다. 절대적으로 순탄한 부부가 없다. 어느 여름날 밤, 갑자기 누군가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그때 우린 자고 있었다. 정윤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사람이 없었다. 다시 문을 닫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뚝뚝뚝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련속 세번이나 정윤이가 문을 열어보았으나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무서워 이불속에 숨었다.

누구야? 야밤중에 와서 문을 두드려? 그림자도 소리도 없이. 뭐하는 짓이야?

정윤은 문을 닫은 뒤 큰소리로 나보고 일어나라고 했다. 나는 그가 그토록 성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나보고 말했다. 문 두드린 사람이 누구야? 너는 꼭 알거야, 빨리 그 사람을 대라. 나는 무섭고도 놀랐다. 누군지 내가 어찌 알랴? 의도가 무엇일가? 나는 울면서 정윤에게 말했다.

“오랜 세월동안 당신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토록 어려웠던 나날에도 우리의 감정은 그렇게 확고했다. 당신이 평생 가난했지만 나는 당신의 인품을 보고 살아왔다. 그런데 도리여 나를 믿지 못하고 그 사람이 누군지 대라고?” 나는 엄청난 억울함을 당했지만 어떻게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정윤은 화김에 뒤방 창문 유리를 발로 찼다. 발에서 피가 흘렀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려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이튿날 점심, 내가 시어머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게 되였는데 시어머님이 물었다. “눈이 왜 그렇게 부었느냐? 어데 아프냐 ?” 나는 울면서 시어머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어제 야밤에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온 저녁 내내 싸웠어요. 정윤은 내가 바람났다고 의심하며 화김에 유리창을 박살냈어요.” 시어머님도 그 사람이 누굴가 하고 이상해 했다. 점심에 시아버님이 밭에서 돌아왔다. 시어머님은 어제 저녁 누군가가 아들집에 와서 몇번이고 문을 두드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아들 며느리가 온 밤 싸웠다고 시아버님께 말했다.

시아버님의 대답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놀라 펄쩍 뛰게 만들었다. 시아버님이 우물쭈물 말했다. “바로 나야, 내가 술을 마시고 세번 문을 두드렸어요, 손자를 보고 싶어서 말이야.” 남아선호사상의 조선족 시아버님이 얼마나 손자를 아끼시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야밤삼경에 문을 두드렸다고 우리가 뭐라 할가봐 번마다 문을 두드리고는 우리 집 뒤마당의 옥수수밭에 숨어서 우리가 찾지를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뒤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을 호되게 닦아세웠다. 그러나 나는 시아버님의 마음을 리해했다. 그리고 정윤이도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보아냈다. 리해와 순종은 가장 좋은 약이였다.

아들이 여섯살때 가족사진

낮에 일하는 외에도 밤이면 마을사람들을 도와 옷이며 모자며 앞치마를 가공해 수입을 늘여서는 살그머니 돈을 저금했다. 시부모님 환갑 되는 해에 그 돈으로 비단이불 한채를 마련하여 시아버님 환갑 선물로 드렸다. 환갑날에 며느리가 마련해준 비단이불을 덮어보는 것이 그때 많은 로인들의 념원이였다. 물론 시아버님의 념원이기도 했다. 조선족으로 말하면 이는 가족의 영광이였다. 나는 시부모님을 35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벽돌집으로 이사시켰고 그들로 하여금 천륜지락을 누리게 했다. 시어머님은 어느 한번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취재를 받으며 이렇게 기자에게 말했다. “미옥이와 같은 며느리는 하늘 아래 하나뿐이라오. 우리는 정말 행복하오.” 할머니는 어디 가나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자랑한다. 나는 그의 혈연없는 딸로 되였다.

시부모님 환갑잔치에서 큰절을 올린다.

나와 정윤의 사랑은 순결하고 진실하다. 사랑에는 계선이 없다. 진실만 있다면 기적은 반드시 있게 된다. 우리는 서로 보완하며 쉽게 이룰 수 없는 이 가정을 영위해왔다. 모순속에서 인내를 선택하고 론쟁속에서 순종을 선택했다.

나는 자신의 행동으로 그와 그의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수림제(寿林娣)며 상해 미옥이다. 이 이름은 빈하중농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나 또한 시간으로 증명했다. 나는 조선족의 큰며느리가 되기에 손색없고 이 대가족의 큰 살림군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을.

정윤은 자식으로서 효도하고, 아버지로서 자애롭고, 남편으로서 사랑을 주고, 인간으로서 관용을 베풀고. 자신에게 엄격하며 착실하게 일하고 청백하게 행동하여 나와 아들딸들에게 건강한 가정문화를 만들어주었고 화목하고 청렴한 가풍을 형성시켰다. 나의 마음속에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정신적 재산이다.

살아가면서 나는 진정으로 녀강자로 되였고 ‘민족단결모범’‘선진사업일군’으로 되였다. 나의 우수한 세 아들딸들은 사회를 위해 공헌을 하고 있다. 나는 그때 이 가정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본 대로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수림제(寿林娣)

편역: 길림신문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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